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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거듭나, 자신을 바로잡고, 절망을 떨치고 일어나 희망을 가지기 위한 모든 노력의 출발점은 늘 우리 자신의 경험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역사가 우리를 데려다놓은 그 지점에서부터만, 우리의 행위들이 축적된 그 지점에서부터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

윈델 베리 "삶은 기적이다." 中

  윈델 베리의 "삶은 기적이다."의 도입부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문장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인데, 이미 몇 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참 더 읽을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는 여기에 대해 짧게 썼지만 생각을 좀 더 끌어내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1.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개인적 경험 안에서 그렇다.
  흔히 책을 읽는다는건 거인의 어깨에 서는 거라고 비유합니다. 그 어깨 위에 올라가면 좀 더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이해하는 정도입니다. 어쩌면 내가 있는 자리에서 발돋움해서 잠깐 엿볼 수 있을 뿐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혼자 책을 본다는 것, 혼자의 경험은 결국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들을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만에 머무릅니다. 거기까지가 나이고 내 한계인거죠. (그래서 여럿이서 같이 읽고, 여러 시각에나 나누는걸 권하고, 이를 할 수 있는건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것 뿐만 아니라 주위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바꿔가는 것, 지경이 넓어진다는 건 모두 이 테두리 안에 있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2. 경험은 개인적 속성이 있다. 
  경험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입니다. (우리나라에게 1997년을 생각하면 IMF를 떠올리게 되고, 2002년은 한일월드컵을 많이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함께 겪게되는 경험이나, 해석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는 정리된 경험은 있겠습니다만) 그래서 쉽게 이걸 보편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하죠. 그래서 내 경험을 남들에게 그대로 투영하거나, 내 결론을 정답처럼 이야기하는 식의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더라. 너도 내 나이되면 알게 되.", "내가 해봤더니~" 투의 이야기는 어쩌면 일종의 폭력일 수 있습니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역풍을 맞은 부분도 바로 그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사회적 구조에 대한 고민이나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그저 네가 잘하면 된다는 조언은 어쩌면 무책임하죠. 경험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어서 그대로 사용하면 안됩니다.

3. 누가 대신 끌고 가주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내 성장을 누가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자기가 서 있는 그 지점에서 스스로 결정하여 나아갈 수 밖에 없죠. 옆에서 조언해주기도 어렵습니다. 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와 인생을 같이하며, 포기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갈 수 있는 소중한 동반자의 존재는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라틴어로만 성경을 제한해서 해석을 독점한 중세 카톨릭처럼 권력자들은 대중이, 시민 개개인이 지적으로 성장하고 생각이 깨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요즘은 바쁨이 생각할 여유를 빼앗는 시대 같은데요, 이런 와중에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하기는 어렵죠. 

4. 항상 새롭게 시작하여야 한다.
  예전에 페이스북을 보다가 지성근 간사님이 장래 희망이라며 적어놓은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 분은 앞으로 "변화하는 노인"이 되고 싶다셨죠.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점점 완고해지고 고집이 세지는 경향이 있는거 같습니다. 점점 내가 잘못가고 있는걸 인정하기 힘들어집니다. 부정해야 하는게 커지기 때문에 그런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믿는대로 살아온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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